건강칼럼

일과 돌봄의 일상에서

최고관리자
2018.03.12 18:21 47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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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돌봄의 일상에서

이준구

어느듯 나이가 들어 나이드신 어머님과 이모님을 걱정하는 인생의 단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오십이면 지천명으로 하늘이 이 땅에 보낸 이유와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아 어떻게 살아갈지 아는 나이라는데 준비없이 마주하는 일상의 돌봄은 서툴고 버겁기만 합니다. 돌봄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노인의 노쇠함에 대한 모름도 있지만 나의 사회생활의 많은 시간을 어머님에게 투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기도 합니다. 돌봄도 서비스를 구매하는 시대에 살지만 나와 어머니의 사정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과거 대가족 시대이거나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에는 형제간이나 이웃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에 코 받고 사는 것도 버거운 현실에서 돌봄 자원을 찾는 것은 난감합니다.
나이든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돈, 시간, 그리고 마음내기입니다.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 한 그리고 삶의 속도를 늦추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곳으로 이전하지 않는 한 돌봄에 꼭 필요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기 위해 돈을 벌여야 합니다. 돌봄을 다른 면에서 바라보면 마음을 내어 도움이 필요한 어머니를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일상의 우선 순위의 조정이 필요합니다. 누구는 나이 들고 병드는 것이 인생이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작년과 달라지는 노쇠함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은 허물어져 가는 성벽을 두 손으로 막아보려는 지나침으로 나타나고 돌봄이 마감이 있는 과제처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떨어지는 지각 능력과 통증은 당신네들의 삶의 반경을 좁혀가게 됩니다. 특히 통증은 움직임을 제한하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힘도 여력도 떨어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먹어서 왜 그래요 ”라고 자식들이나 젊은 사람의 지청구를 듣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더 받게 됩니다. 가출하고 싶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감옥 아닌 감옥인 집에서 온 종일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들의 통증은 직접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 쭉 훝어 보는 것은 통증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두 분 선배님(이행, 전철수)의 가르침으로 통증에 대해서 자세히 살피고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나이 드신 분들의 몸에 통증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구에 통증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괴로움과 그로인한 삶의 긴장도가 높아져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연민의 마음이 자주 올라옵니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때 어머니의 준비과정은 많이 시간이 소요됩니다. 입을 옷을 챙기고 허리복대를 찾아서 허리를 감싸고 바깥 나가서 발생할 요실금에 대비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라는 이루어지는 과정을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 빨리 준비하세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말은 저를 떠나서 어머니의 마음 밭에 화살로 날아가게 되고,. “ 니도 나중에 나이들어 봐라”라는 되돌아 오는 말에 미안함과 저의 미래의 모습이 교차됩니다.

돌봄의 과정은 복잡하며 상호작용으로 새롭게 생성되는 일상입니다. 특히 감정과 느낌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보다는 감정과 과거의 기억에 기댄 측면이 훨씬 더 강하고 부딪힘 속에서 서로에게 에너지가 충전되기도 하지만 상처가 되고 생채기로 남기도 합니다. 일단 돌봄의 모드로 일상이 전환이 되면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가게 됩니다. 돌봄에서 저의 마음 상태를 보면 바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합니다. 모임에 가거나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인해 바삐 식사나 운동을 가르쳐 드리고 서둘러 나오는 경우에 허다하니 어머니의 입장에서 소홀함이라 느끼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일상을 챙기는 것이 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인생의 여행길에서 또 다른 추억을 잘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이제 저에게 요양병원도 참 익숙한 곳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이모님의 간병을 해 보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입주 간병사님이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고 욕창이 생기고 소독하고 관리하는 일이 힘들어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요양병원 방문은 일주일에 한 번 짧은 시간을 낯선 이방인처럼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 아니고 몸이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무겁고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이모님과 저는 제 나이만큼 이 지구별에 함께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이모님의 존재를 잊고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질 때 생명의 연결도 끊어지고 소멸되어 갈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병이 들어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요양시설로 격리되고 수용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노년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정작 개인들은 생존의 자건거에서 내려올 수 없고 계속 바퀴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노년을 잘 준비하고 있지 못하고 인간다운 복지에 대해서 당당한 요구와 행동도 회피하게 됩니다. 요양병원의 문화는 환자 한 사람마다의 살아온 과거를 묻지 않으며,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들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액제 요양수가 하에서 그들의 관심은 비용을 절감하는데 집중되며 자신들의 프로토콜에 따라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치유와 돌봄은 가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에 필요한 것은 인생은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약해진 육신이지만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식이나 이웃의 도움입니다. 일본 오키나와 현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만 좋다면 지능이 저하된 치매 노인도 다른 사람에게 페를 끼치는 주변증상을 보이지 않고, 평온하게 평범한 삶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일생을 살아온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함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저에게 노년을 잘 준비하는 탐색을 요청하게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도 성찰하면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 봅니다. 40대에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50대에 이제 시작해도 늦지는 않았겠지요 

댓글목록 1

이슬님의 댓글

이슬 2018.03.24 11:45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